럭셔리 + 스포츠의 원조, 벤틀리
2016-05-02 07:43:30 글 박영준(단국대 법과대학교수, 자동차 칼럼니스트)
에토레 부가티는 거대한 차체와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벤틀리를 ‘세상에서 가장 빠른 트럭’이라 비꼬았다
2015년 9월에 열린 2015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는 벤틀리가 새롭게 발표한 벤테이가였다. 그동안 럭셔리 스포츠 세단의 대명사였던 벤틀리가 발표한 첫 번째 SUV였기 때문이다. 스포츠카의 대명사 포르쉐가 2002년 9월 파리 오토살롱에서 카이엔을 발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통 벤틀리 마니아들에겐 벤틀리도 시대의 대세를 따라갔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순수하게 경제적인 평가로는 벤테이가가 앞으로 벤틀리의 달러박스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벤틀리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벤틀리가 SUV 시장에 참여한 것이 오히려 약간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벤틀리가 르망 24시 레이스를 제패하던 시절, 에토레 부가티는 벤틀리의 거대한 차체를 비꼬아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트럭’이라고 불렀고 이는 벤틀리의 별명이 됐다. 미국에서 SUV가 트럭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것을 본다면 벤틀리가 SUV를 만드는 것은 ‘숙명’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사실 벤틀리는 초기에 르망 24시 레이스를 제패하던 영광의 시절을 거쳐, 롤스로이스의 쌍둥이 브랜드로서 그다지 존재감 없던 시절을 지나, 폭스바겐에 인수되어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고유한 럭셔리 스포츠 브랜드로서 진가를 발휘하는 파란의 역사를 갖고 있다.
1888년 태어난 월터 오웬 벤틀리는 형제인 호레이스와 함께 1912년부터 프랑스 DFP 자동차를 영국에 수입, 판매했다. 항상 자신만의 자동차를 만들 궁리를 하던 월터는 1913년 DFP 자동차의 공장을 방문하던 중에 알루미늄 문진을 보고는 알루미늄도 충분한 강도를 가질 수 있다는 착상을 하였고 자신들이 수입한 DFP 자동차의 엔진 피스톤을 알루미늄으로 개조, 브룩클랜즈 자동차 경주에 참가했는데 첫 참가에서부터 각종 기록을 깨며 우승을 휩쓸었다.
자신을 얻은 그는 1919년 벤틀리 자동차를 영국 크릭클우드에 설립했다. 첫 모델인 ‘3 리터’는 튼튼한 섀시와 강력한 엔진을 바탕으로 각종 경주 대회에서 상위권으로 입상했다. 당시 영국에서 자동차는 엔진 출력(마력)을 모델명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벤틀리는 엔진의 배기량을 모델명으로 처음 썼다.
부자이면서 자동차 경주광인 울프 바나토와 그의 백만장자 플레이보이 친구들은 벤틀리를 특별히 좋아해서 사교계에서 ‘벤틀리 보이즈’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이들은 벤틀리를 가지고 르망 24시 레이스에 참가, 우승하게 됐고 벤틀리의 명성을 한껏 올렸다. 4.5L 수퍼차저 엔진의 ‘블로워 4.5’와 6.5L 엔진의 ‘스피드 식스’ 모델로 1927년부터 1930년까지 4년간 르망 24시 레이스 우승을 휩쓴 벤틀리는 거대한 차체와 강력한 엔진 힘으로 마초를 상징하는 자동차가 됐다.
창업 초기부터 강력한 스포츠카 개발에 매진하던 벤틀리는 자금 조달에 문제가 있어서 1925년에 울프 바나토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그의 자금으로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자 경영난이 심해졌고 결국 1931년 파산하게 된다.
파산한 벤틀리는 공개 경매에 붙여졌는데 이를 인수한 회사는 놀랍게도 경쟁사인 롤스로이스였다. 벤틀리는 이후부터 롤스로이스의 더비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사실상 롤스로이스와 동일한 모델이 브랜드만 다른 모습으로 판매된다. 일종의 배지(badge)시스템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적의 공습으로부터 안전한 곳인 크루로 공장을 이전한 후 롤스로이스와 벤틀리는 계속 같은 모습-다른 브랜드의 형태로 나왔다. 벤틀리의 입장에서는 독립성을 잃어버린 암흑기였던 셈이다.
1997년에 폭스바겐은 BMW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롤스로이스를 인수한다. 그러나 BMW가 롤스로이스 브랜드에 관한 권리를 가져가는 바람에 폭스바겐은 결과적으로 롤스로이스의 크루 공장과 벤틀리 브랜드만을 얻었다. 폭스바겐의 품 안에서 벤틀리는 켄티넨탈 GT를 새로운 모델로 발표하는데 전통의 크루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정통성과 합리적인 가격을 바탕으로 매우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루었고, 이제는 벤테이가로 럭셔리 SUV시장의 석권까지 노리고 있다.
벤틀리에 관하여 많이들 모르는 사실 한가지. 벤틀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양쪽에 날개를 가진 B 모양의 배지를 상표로 쓰고 있다. 그런데 그 양쪽 날개의 깃털 수가 서로 다르다. 초기 벤틀리는 왼쪽에 13개, 오른쪽엔 14개의 깃털이 있었고,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후 더비 공장 시절엔 왼쪽에 10개, 오른쪽엔 11개의 깃털이 있었다. 이후 크루 공장 시절엔 양쪽이 모두 10개로 같았다가 폭스바겐이 인수한 이후엔 다시 왼쪽에 10개, 오른쪽엔 11개의 깃털로 돌아왔다.
양쪽 깃털의 수가 다른 이유는 월터 벤틀리가 형제인 호레이스와 상표를 만들고 보니 너무 멋있어서 분명히 다른 메이커가 복제할 것을 염려하며 자신들만의 비밀로 양쪽 깃털 수에 차이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변에 세워져 있는 벤틀리가 있으면 양쪽 날개의 깃털 수를 잘 세어보시길...